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AI 시대, 인간의 본질을 묻는 영화 ‘맨 프롬 어스’ (불멸성, 사고와 감정의 교차점, 신념의 충돌,철학적 SF의 정수, 인간다움)

by 드라마 영화 박사 2025. 5. 22.

영화 맨 프롬 어스 대표 포스터

영화 ‘맨 프롬 어스(The Man from Earth, 2007)’는 보기 드문 저예산 철학적 SF 영화입니다. 단 하나의 배경, 몇 명의 인물, 그리고 오직 ‘대화’만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 세계적으로 ‘생각하는 영화’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2025년 현재,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더욱 유의미하게 다가옵니다.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지성은 정보량인가, 아니면 존재에 대한 질문인가? 영화 ‘맨 프롬 어스’는 이 질문들에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깊이 있게 탐구하도록 우리를 유도합니다.

불멸이라는 설정, 인간 정체성의 거울

영화는 미국 대학의 역사학 교수 존 올드맨이 뜻밖의 퇴직을 선언하며 시작됩니다. 주변 동료 교수들은 갑작스러운 이별을 납득하지 못하고 그의 집에 찾아오지만, 존은 그 자리에서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는 1만 4천 년을 살아온 불멸의 인간이며,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문명의 발전을 지켜본 '산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여겼던 교수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의 말에 빠져들게 되고, 관객 또한 "만약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이라는 전제로 깊은 사색의 세계로 끌려 들어갑니다.

존의 고백은 단순한 SF 설정이 아닙니다. 그는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실제로 수많은 시대를 경험해 왔다고 말하며, 석기 시대부터 수메르 문명, 불교의 탄생, 예수 시대, 르네상스,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은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영화는 인간이 경험한 '시간'과 그 속에서 쌓이는 기억, 사고의 전개, 그리고 가치관의 변화가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곧 '기억이 인간을 만든다'는 주제를 드러냅니다.

존은 한 시대의 인간으로 머물지 않았고, 꾸준히 학습하고 변화했으며, 새로운 이름과 정체성으로 전 세계를 여행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설정은 단순히 신비로운 삶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란 변화와 학습, 기억의 총합체’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불멸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AI 시대의 인간성, 사고와 감정의 교차점

현대는 인공지능이 지식 습득과 문제 해결 능력에서 인간을 추월하는 시대입니다. AI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는 기능에서는 이미 많은 분야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맨 프롬 어스'는 이 같은 시대 흐름 속에서도 인간이 AI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사고가 단순한 연산이 아닌, 감정, 경험, 믿음, 윤리, 신념 등 다양한 요소와 얽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속 존 올드맨은 철학, 신학, 생물학, 고고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깊은 지식과 통찰을 보여줍니다. 그는 단지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시대를 살며 느끼고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지성을 드러냅니다. 그의 대화는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맥락과 인간 내면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로 가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지성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AI는 감정을 모방할 수는 있어도, 진정으로 느끼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겪은 일들을 통해 교훈을 얻고, 감정을 바탕으로 관계를 형성하며, 그것을 삶의 철학으로 발전시킵니다. ‘맨 프롬 어스’는 바로 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존이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삶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이는 AI가 구현하기 어려운 인간 고유의 능력입니다.

논리적 사고와 신념의 충돌

영화가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신앙’과 ‘진실’이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존은 이야기 도중 자신이 예수라는 인물의 모델이었을 수도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합니다. 이것은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로, 종교학 교수인 친구가 이 고백을 듣고 심리적으로 붕괴하는 장면은 인간이 가진 신념체계가 얼마나 강력하고도 불안정한지를 드러냅니다.

존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문제는 그 사실 여부가 아닙니다. 관객은 영화 속 인물과 함께 질문하게 됩니다. “만약 내가 믿어온 진실이 모두 허상이었다면?”, “나는 어떤 기준으로 진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 장면은 과학적 사고와 종교적 신념, 개인적 믿음과 객관적 사실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며, 인간이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한 심리 구조를 따르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AI와 인간의 또 다른 차이를 설명하는 근거가 됩니다. AI는 논리와 통계를 기반으로 판단하지만, 인간은 때로는 비논리적 신념에 기반해 판단을 내립니다. 이는 비효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인간의 감성과 도덕성, 윤리관이 형성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를 통해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복잡하고 입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대화와 사고의 미학, 철학적 SF의 정수

‘맨 프롬 어스’는 영화 내내 단 한 번의 플래시백이나 회상 장면 없이, 오로지 현재의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 같은 서사 구조는 연극 무대와 흡사하며, 관객은 마치 대학 강의실에서 교수들의 철학 토론을 듣는 듯한 몰입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서사’보다 ‘사유’를 중심에 두는 영화의 기획 의도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많은 콘텐츠는 시각적 자극과 빠른 전개를 통해 소비됩니다. 짧고 강렬한 클립, 요약 콘텐츠, 짧은 영상의 유행은 인간의 집중력과 사고 능력을 점점 수동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맨 프롬 어스’는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이 영화는 느리고, 조용하며, 오로지 ‘사유’만으로 진행됩니다.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 명의 인물, 한 명의 인간에 대해 의심하고 납득하고 질문하며, 결국 자기 성찰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은 인간의 진정한 사고 능력이 ‘지루함’을 견디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유’는 집중력, 인내력, 내면의 성찰에서 비롯되며, 이는 AI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고차원적 활동입니다. 결국 ‘맨 프롬 어스’는 인간의 본질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고전적인 정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이 사람들에게 본인 이야기를 하는 모습

기억, 시간, 그리고 인간다움

존 올드맨이 가진 최고의 능력은 불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수천 년 동안 축적된 ‘기억’입니다. 인간은 시간에 구속되며, 그 안에서 경험을 통해 자신을 구성합니다. AI는 기억을 저장하고 정리할 수 있지만, 인간처럼 ‘기억에 감정을 부여하고 의미를 해석’하지는 못합니다. 존이 묘사하는 과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존재의 숨결이 깃든 회상입니다.

그는 한 시절에는 불교 수행자였고, 다른 시절에는 해양 탐험가였으며, 또 다른 시기에는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였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의 가치관은 변화했고, 세계관은 확장되었으며, 정체성은 계속해서 다시 구성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입니다. 인간은 한 가지로 규정되지 않고, 시간과 관계 속에서 변주되며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AI는 기억을 완벽하게 저장할 수 있지만, 인간은 망각을 통해 삶의 의미를 재구성합니다. 이 역설이야말로 인간과 기계의 본질적 차이점이며, 영화는 이 지점을 섬세하게 강조합니다. 기억은 곧 시간이고, 시간은 삶이며, 삶은 곧 인간 그 자체입니다.